그러니까 나는, 바퀴벌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이집에서 꽤나 오랫동안 편안히 지내고 있다.
주인 남자는 의외로 다정다감해서 바퀴벌레인 나를 봐도 죽이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방심해서 그 남자 바로 앞의 벽을 천천히 기어 갔던 적도 있다.
남자는 "오늘은 귀찮아서 봐 주는데, 또 대낮에 기어 다니면 죽여 버릴테다"
라며 조용히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남자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남자는 나를 여태 죽이지 않았다.
내 주위의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볼때,
바퀴벌레를 죽이는 인간은 두가지 종류이다.
바퀴벌레가 무서운 사람, 바퀴벌레가 싫은 사람.
뭐가 다르냐고 하겠지만,
이 차이는 바퀴벌레가 되어 보기 전엔 알기 힘든,
그런 미묘하고 철학적인 문제니까
굳이 힘들게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다.
어쨋든 남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두 종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듯 보인다.
남자는 몇일 씩 집안에만 머무는 날이 많았다.
잠도 잘 자지 않아서 항상 행동 거지를 조심해야 했지만,
삶을 보장 받는 대가로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 남자가, 얼마 전 부터는 하루종일 집을 비우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 자명종이 울리면 끙끙 거리면서도 기어코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 버린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들어온다.
남자는 다정하게도 항상 방의 온도를 18도에 맞춰 놓기 때문에
나는 바깥 날씨를 알기 힘들다.
하지만 요즘은 남자의 어깨에 스며 있는 공기 덕에
그 날의 날씨를 맞추는 재미가 늘었다.
늦은 시간에 들어온 남자는 어느새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를 한다.
나는 그 남자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다만 가끔 누군가와의 통화속에서 숙제라든지,
수업이이라든지 하는 말들로 미뤄 봐서 남자는 '학생'이 된 듯 하다.
아, 난 학생이 무엇인지 잘 안다.
이 집으로 오기 전에 머물던 곳은 그 끔찍한 학생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는 항상 '공부' 라는 것을 시키기 위해 노심초사 했고,
학생들은 어디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코피를 쏟고는 했다.
이 집엔 그 끔찍한 부모도 없는데 왜 남자가 '학생'이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역시나 남자도 학생이 된 후로 혼자 투덜거리며 욕지거릴 내뱉는 횟수가 늘었다.
잠시 궁금한 마음에 남자가 학생이 된 이유를 고민해 봤지만,
원래 생각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남자가 학생이든 아니든, 나는 오늘 조금 슬프다.
이틀 후면 남자가 이 집을 떠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어떤 집, 어떤 벽, 어떤 틈 따위가 중요한 것이지
어떤 사람이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니, 없.었.다.
나도 이제 이 곳을 떠날 것임을 오늘 확실하게 느꼈다.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
분명 친구들은 나를 미친 바퀴벌레 취급 하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남자가 없기 때문에 떠날 것이다.
"왜?" 라는 질문은 우리에겐 금기시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종일 그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왜 나는 남자가 없는 이 곳에 살기 싫은 것일까?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남자는 오늘은 조금 여유로워 보인다.
항상 집에만 있던 시절 처럼 콧노래도 부르고,
앉은채 실룩 거리며 춤도 춘다.
그런 남자를 보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온종일 되뇌었던 의문이 풀렸다.
마치 오래전 다른 집에서 배가 고파 탈진 직전의 상태일 때,
기적처럼 내 코앞에 떨어졌던 주인이 흘린 빵조각 처럼,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왜 남자가 '학생'이 되었는지,
왜 더 이상 내가 이 곳에 있고 싶지 않은지.
그건 도저히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이다.
남자는 '인간' 이고 나는 '바퀴벌레' 지만,
그 다름은 내성이 생긴 후에 뿌려지는 살충제처럼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그런 것이다.
그렇게 남자와 나는, 다르지만 같다.
겨울이 끝나가며 아침이 일찍 오기 때문에
남자가 집을 나가는 시간이 되면 이미 바깥은 밝다.
적당히 두꺼운 외투를 입은 남자는
아직은 찬 아침바람을 가리려 단추를 채운다.
매연 냄새에 찌든 듯한 몸의 남자와
남자의 듬성 듬성한 수염과
먼 길에서 검은 승용차가 달려가는 소리와
남자의 기분과
나의 마음과
우리들의 방
밤은 모든 흔적을 삼켜 버린다.
하지만 남자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만은
쫑긋하게 서 있는 내 더듬이에 닿는다
나도,
그리고 아마 남자도,
이 세상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남자와 남자의 바퀴벌레
inspired by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아무도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이집에서 꽤나 오랫동안 편안히 지내고 있다.
주인 남자는 의외로 다정다감해서 바퀴벌레인 나를 봐도 죽이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방심해서 그 남자 바로 앞의 벽을 천천히 기어 갔던 적도 있다.
남자는 "오늘은 귀찮아서 봐 주는데, 또 대낮에 기어 다니면 죽여 버릴테다"
라며 조용히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남자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남자는 나를 여태 죽이지 않았다.
내 주위의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볼때,
바퀴벌레를 죽이는 인간은 두가지 종류이다.
바퀴벌레가 무서운 사람, 바퀴벌레가 싫은 사람.
뭐가 다르냐고 하겠지만,
이 차이는 바퀴벌레가 되어 보기 전엔 알기 힘든,
그런 미묘하고 철학적인 문제니까
굳이 힘들게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다.
어쨋든 남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두 종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듯 보인다.
남자는 몇일 씩 집안에만 머무는 날이 많았다.
잠도 잘 자지 않아서 항상 행동 거지를 조심해야 했지만,
삶을 보장 받는 대가로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 남자가, 얼마 전 부터는 하루종일 집을 비우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 자명종이 울리면 끙끙 거리면서도 기어코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 버린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들어온다.
남자는 다정하게도 항상 방의 온도를 18도에 맞춰 놓기 때문에
나는 바깥 날씨를 알기 힘들다.
하지만 요즘은 남자의 어깨에 스며 있는 공기 덕에
그 날의 날씨를 맞추는 재미가 늘었다.
늦은 시간에 들어온 남자는 어느새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를 한다.
나는 그 남자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다만 가끔 누군가와의 통화속에서 숙제라든지,
수업이이라든지 하는 말들로 미뤄 봐서 남자는 '학생'이 된 듯 하다.
아, 난 학생이 무엇인지 잘 안다.
이 집으로 오기 전에 머물던 곳은 그 끔찍한 학생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는 항상 '공부' 라는 것을 시키기 위해 노심초사 했고,
학생들은 어디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코피를 쏟고는 했다.
이 집엔 그 끔찍한 부모도 없는데 왜 남자가 '학생'이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역시나 남자도 학생이 된 후로 혼자 투덜거리며 욕지거릴 내뱉는 횟수가 늘었다.
잠시 궁금한 마음에 남자가 학생이 된 이유를 고민해 봤지만,
원래 생각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남자가 학생이든 아니든, 나는 오늘 조금 슬프다.
이틀 후면 남자가 이 집을 떠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어떤 집, 어떤 벽, 어떤 틈 따위가 중요한 것이지
어떤 사람이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니, 없.었.다.
나도 이제 이 곳을 떠날 것임을 오늘 확실하게 느꼈다.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
분명 친구들은 나를 미친 바퀴벌레 취급 하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남자가 없기 때문에 떠날 것이다.
"왜?" 라는 질문은 우리에겐 금기시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종일 그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왜 나는 남자가 없는 이 곳에 살기 싫은 것일까?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남자는 오늘은 조금 여유로워 보인다.
항상 집에만 있던 시절 처럼 콧노래도 부르고,
앉은채 실룩 거리며 춤도 춘다.
그런 남자를 보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온종일 되뇌었던 의문이 풀렸다.
마치 오래전 다른 집에서 배가 고파 탈진 직전의 상태일 때,
기적처럼 내 코앞에 떨어졌던 주인이 흘린 빵조각 처럼,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왜 남자가 '학생'이 되었는지,
왜 더 이상 내가 이 곳에 있고 싶지 않은지.
그건 도저히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이다.
남자는 '인간' 이고 나는 '바퀴벌레' 지만,
그 다름은 내성이 생긴 후에 뿌려지는 살충제처럼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그런 것이다.
그렇게 남자와 나는, 다르지만 같다.
겨울이 끝나가며 아침이 일찍 오기 때문에
남자가 집을 나가는 시간이 되면 이미 바깥은 밝다.
적당히 두꺼운 외투를 입은 남자는
아직은 찬 아침바람을 가리려 단추를 채운다.
매연 냄새에 찌든 듯한 몸의 남자와
남자의 듬성 듬성한 수염과
먼 길에서 검은 승용차가 달려가는 소리와
남자의 기분과
나의 마음과
우리들의 방
밤은 모든 흔적을 삼켜 버린다.
하지만 남자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만은
쫑긋하게 서 있는 내 더듬이에 닿는다
나도,
그리고 아마 남자도,
이 세상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남자와 남자의 바퀴벌레
inspired by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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