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둥실, 구름 따라 가는길> 3. Be my guest. 양지앙에서 잔지앙까지.
전 뭐랄까.. 모든게 느린 사람입니다.
움직임이 느리다기 보다.. (아, 그것도 결코 빠르다곤 못하지만 ㅋ)
마음이 느리다고 해야 맞을 듯 합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를 만나서 마음을 열때,
또 누군가와 헤어지게 되어서 마음을 닫을 때..
혹은 어떤 일을 준비하고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
군대가서 제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곳은 '빠릿빠릿' 이 최고의 미덕 중 하나인 곳이니까요.
눈치는 좀 있는 편이어서 어떻게든 맞춰 살았지만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금 이 방랑길에서 제가 또 하나 도전해 볼 부분입니다.
전 느린게 좋습니다만, 어떤 순간엔 그게 방해가 되기도 하니까요.
제가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지 한 번 해보는 겁니다.
그래도 안되면, 뭐 그렇게 받아들이고 살아야죠 ㅎ
이번 편은 또다시 마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양지앙에서 떠나는 날 몸 상태가 영 꽝이었습니다.
가정집이라고 방심한게 탈이었죠.
얇게 입고 자다가 새벽에 한기 때문에 깼는데 이미 그땐 늦었습니다.
네, 감기가 걸린거죠.
떠나기로 했는데 기침나고 콧물도 나오고 열도 납니다.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계속 머물긴 싫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출발해 봅니다.
잔지앙 까진 좀 무리해서 밟으면 이틀 거린데.. 아무래도 힘들것 같습니다.
천천히 달려 아예 느긋하게 숙소를 구하든 텐트칠 자리를 찾기로 맘먹고
여유있게 달렸습니다.
4시쯤 되서 주유소에 들어가 열기를 씻어냅니다.
저번에 텐트에서 잘 때 몸의 열기 때문에 자기 힘들었던 경험 덕입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주유소 앞으로 누군가 가방과 깃발이 달린 자전거를 타고 휭 지나갑니다.
분명 자전거 여행자 같습니다.
잠시 멈칫하고는 쫓아가 봅니다.
그러나 제 속도로는 도저히 안잡히더군요.
다시 포기하고 천천히 가면서 잘 곳을 찾습니다.
그러다 다시 제 눈에 그 자전거가 보입니다.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가서 말을 걸어봅니다.
이 사진은 나중에 찍은 거지만..
어쨌든 치과 의사랍니다. 근데 나이는 22. 우리나이로 24.
얘기 들어보니 수련의 쯤 되는 듯 합니다.
어느정도 영어를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걸 다 말할 정도는 아니어서 제가 완벽히
알아들은 건진 모르겠습니다.
저 깃발은 일종의 '이를 잘 닦자' 쯤 되는 것 같습니다.
밝고 활달합니다.
이름은 쿤밍이고.. 이날 마오밍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전 이미 거기까지 가는 건 포기한 상태였지만..
혹시 따라가면 숙소 잡기 편할까 싶어 일단 따라가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입니다.
뒤에 가벼운 옷정도만 실은 상태인데다 저보다 훨씬 젊고 튼튼합니다.
계속 따라가단 제가 쓰러질 것 같습니다.
결국 세워서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근데 근처에서 빈관을 잡아서 같이 머무르겠다고 합니다.
응?
안그래도 되는데..
어쩌면 쿤밍도 심심했을지 모릅니다.
이친구도 혼자 자전거 여행 떠난게 처음이라는 군요.
뭐 저야 나쁠거 없으니 그러자고 했습니다.
결국 쿤밍이 마오밍 가기전 시골 마을에서 빈관을 찾아 들어갑니다.
근데 숙박비도 다 자기가 냅니다.
80위안이니 두명 생각하면 괜찮은 가격이지만..
초면에 어린친구가 그러니 당황스럽습니다.
저녁을 먹으러 갔더니 그것도 자기가 계산합니다.
응?
이거 뭔가 이상한데..
그리고 다음날 제가 계속 325 국도만 타서 심심하다고 했더니
다른길로 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저 혼자였으면 절대 못갔을 그런 곳으로 돌아다닙니다.
쿤밍은 원래 계획 대로면 이날 잔지앙에 갔어야 했는데..
그냥 저랑 같이 다닙니다.
덕분에 예정에 없던 바다도 보고 정말 구석진 시골 마을도 들어가 봅니다.
다들 자전거에 잔뜩 실은 짐이 신기한지 다가와서 한마디씩 건넵니다.
전 그저 같은말만 반복하죠. 팅부동. 팅부동.
근데 저 짐을 실은 자전거로 백사장 들어가는 건 다음부턴 사양해야 겠습니다.
모래에 푹푹 빠지니 움직이질 않네요.
이날은 다리보다 팔이 더 아팠습니다. 백사장 빠져 나오느라 몇번을 고생했네요.
와중에 또 어떤 아저씨가 몇번 말을 걸더니 도와준답니다.
물론 대화는 쿤밍이 했죠.
자전거로 가면 한참 돌아갈 길을 자기 배로 태워 주겠다고..
그것도 공짜로..
제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자긴 한국인 처음 본다고.. ㅋ
저 무거운 자전거를 배에 싣고 내리는 것 다 도와주고..
마지막에 악수하고 기념사진 한방 찍은게 단데 계속 웃으십니다.
당연히 이렇게 놀았으니 잔지앙 까진 못갑니다.
원래 들러서 점심 먹기로 했던 Wuchuan 이라는 도시에 저녁에 도착합니다.
아, 가는길에 노익장을 과시하는 할아버지 자전거 여행자도 만납니다.
트레일러에 한가득 짐을 싣고, 심지어 자기 강아지 까지 데리고 하이난으로 가신답니다.
잠시 같이 달렸는데..
마치 축지법 쓰는 것 같습니다.
설렁설렁 페달링 하는 것 같은데 바람처럼 멀어집니다.
존경 ㅜㅜ
우츄안엔 쿤밍의 대학 동기들이 있습니다.
이엔과 셜링인데요.
둘은 1학년때 만나서 지금까지 커플이랍니다.
함께 우츄안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구요.
이엔은 산부인과고.. 셜링은 그냥 일반의 인듯 합니다.
셜링은 워낙 쑥스러워 해서 결국 사진은 못찍었네요..
근데 여기서도 너무 많은 대접을 받습니다.
숙소비는 제가 우겨서 겨우 냈는데..
그 후에 한푼도 제 돈을 쓸수가 없습니다.
밥도 온갖 종류 요리를 잔뜩 시켜서 먹었고..
나중에 제가 커피 마시고 싶다고 해서 KFC 갔는데
제가 계산하려고 주머니에 손 넣기도 전에
이엔이 아이 나무라는 엄마처럼 고개를 흔들더니 계산해 버립니다.
아.. 이래도 되나..
필요한 거 사러가서 로션이랑 지도 등등 사는데
그것도 다 계산하려 들어서 한사코 말렸습니다.
정말 그렇게 까지 신세 지는건 아니다 싶었거든요.
전 그야말로 딸려온 객 아니겠습니까?
근데 이런 손님 대접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밤에 다시 나가서 맥주도 한잔.
(이날 뭐든 다 먹을 수 있다고 큰소리 쳤다가.. 오리 대가리 삶은 요리가 나와서..
미안하다고 하고 포기했습니다. 아, 그 비쥬얼이란.. ㅜㅜ)
사실 저 아니었음 자기들끼린 맥주 거의 안마신다는데..
제가 지나가듯 뱉은 한마디에 세심하게 맥주까지 주문한 겁니다.
물론 계산은 제가 안했구요..
이렇게 지극히 대접하는 게 그냥 단순히 문화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로선 쉽게 적응이 안됩니다.
쿤밍은 하루만에 어느새 어깨동무를 하고 서툰 영어로 스스럼 없이 농담을 던집니다.
저요?
전 그저 쿤밍의 기분 맞춰주는 것 만으로도 벅찹니다.
타인과 편하게 지낼 수 있을 때 까지 전 시간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좀 미안해집니다.
함께 자전거를 탈때도 당연히 제가 많이 느립니다.
전형적인 하체 부실에 짐은 몇배 더 무거우니까..
늘 힘드냐고 묻고 속도를 맞춰주는 건 당연히 쿤밍입니다.
오늘은 드디어 잔지앙에 왔습니다.
워낙 우츄안에서 잔지앙이 가까워서 점심 나절에 도착합니다.
오늘 역시 국도가 아니라 시골길로 달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배를 타고 잔지앙으로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앞 풍경은 제가 어릴때랑 비슷하네요. ㅎ
여기도 쿤밍의 친구가 있습니다.
이름이 싀싀 라고 하네요.. 발음이 미묘한데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되서.. ㅎㅎ
고등학교 친구고 여기서 의대를 다니고 있습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만..
아니나 다를까 역시 제가 계산할 기회는 없습니다.
점심, 저녁, 오후에 함께 동하이라는 섬에 다녀오는 차비와 간식비 까지
다 이 친구가 냅니다.
제가 일부러 안내려고 한게 절대 아닙니다.
어느새 계산을 끝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다에 가서.. 뭐 남자 셋이 딱히 뭐 할게 있겠습니까?
그냥 이러고 놉니다. ㅋ
여기 바다가 잔지앙에서 꽤 멉니다.
버스 타고 한시간 넘게 가네요.
올때도 버스 타고 오는데..
오랜만에 편하게 노을지는 걸 봅니다.
생각해 보니 출발한 후로 그동안은 '저녁 없는 삶' 이었습니다.
당연히 해질 무렵이면 잘 걱정 해야하고 그거 해결하면 밥 먹고,
빨래도 해야하고 어쩌고.. 바쁩니다.
그냥 멍하니 있을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집 떠나고 처음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습니다.
그간은 별로 여유도 없었고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든요.
갑자기 해진 창밖 풍경이 달라집니다.
이런게 음악의 힘이었군요.
가로등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줄 몰랐습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합니다.
랜덤으로 틀어놓았는데 한 곡이 흘러나옵니다.
"Try a little tenderness" 라는 노랩니다.
영화 "Duets" OST 인데요.
아마 보신분은 거의 없을겁니다.
호주 있을때 우연히 기네스 펠트로가 커버에 있길래 빌려 본건데..
영화는 그냥 그렇지만 노래들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영화속 저 노래도 나름 사연이 있거든요.
사흘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것. 제 주위 사람들에 대한 것.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
솔직히 아직도 쿤밍이 저를 대하는 것만큼
이 친구를 편하게 대하진 못합니다.
이제 슬슬 머리가 굳기 시작할 나이이기도 하지요.
뭐든 쉽게 바뀌진 않습니다.
그냥 고맙다, 친절하다. 이런 단순한 느낌 이상의 교감.
그것을 제맘으로 느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쿤밍과 그 친구들 덕에 제 마음속에 무언가
움직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지금 당장은 못해도..
또 다음에 다른 누군가와 이런 시간이 생기면
아마 저는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것 같습니다.
만약 못한다면, 또 그런대로 제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테구요.
아까 마저 못한 영화 얘기를 다시 해봅니다.
이 영화엔 여러명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 중 한명은 평범한 중년의 회사원이구요.
일에도 지치고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남자는
갑자기 담배 사러 나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갑니다.
길 위에서 미친듯이 다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여러일을 겪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그 모든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고 텅빈 건물에 남자가 혼자 앉아 있습니다.
소식을 듣고 아내가 찾아옵니다.
남편과 눈도 마주치지 않던 아내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바쁜 세상에 적응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따뜻한 미소로 남편에게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Be my guest."
그냥 일상적인 영어 표현이지만..
저에겐 매우 인상깊게 남았습니다.
오늘 버스에서 이 남자가 부른 노래를 들으며 다시 저 말이 떠올랐습니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혹은 아예 불가능 할지도 모르지만..
저도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혹은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게,
그냥 쓸데없는 의심과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선뜻 편하게 말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Be my guest."
#아직 다음 행선지를 못정했네요.
이번주 내내 곳곳에 다 비 예보라서..
하이난으로 갈까 싶기도 하고..
다른 한국 여행자로 부터 쿤밍가는 팀에 합류하라는 소식을 들어서
그것도 고민되고..
일단 하루 여기더 머물고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